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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마로니에 가수, 박건의 삶과 노래[1]
2021년 09월 12일 (일) 10:42:09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박건 씨의 최근 모습과 대표곡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수록 음반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 내리 듯...’

하늘과 땅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가을, 그 사이의 공간에 풍요로움과 사라짐, 아름다움과 쓸쓸함... 이러한 상반된 감정들이 가득 채워지는 계절, 가을.

매년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노래가 쓸쓸한 휘파람소리와 함께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로 시작되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다.

주인공은 가수 박건. 1968년 ‘두 글자’에 이어 ‘사랑은 계절 따라’, ‘청포도 고향’, ‘봄이 올 때까지’, ‘잊고 살리라’ 등 분위기 있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60~70년대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가수다.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가창력의 주인공 박건 선생은 어느 덧 칠십대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무대에 서는 동시에 후배들을 양성하는 보컬트레이닝을 겸한 ‘박건가요교실’을 운영 중이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회, 그리고 한국원로예술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가요작가들이 많이 몰려있는 낙원동 송해길에서 거의 매일 만날 수 있다. 가수 겸 작곡가 박건의 삶과 노래, 그 첫 번 째.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l동중우, 최광호(사진작가)

 

매력적인 중저음과 남성적인 외모로 사랑받는‘Mr 마로니에', 가수 박건

▲ 박건씨가 전성기 시절에 발표한 음반들

루----- 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루----- 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루----- 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신명순 작사, 김희갑 작곡, 박건 노래, 1971년)’

‘마로니에 가수’라 불리는 가수 박건의 대표곡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다. 음정에 흔들림이 없고 호흡 또한 길다.

‘가요계의 신사’로 불리는 멋쟁이가수 박건은 1940년 7월17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유천리에서 부친 홍응식(洪膺植), 모친 노재금(魯在今) 사이의 4남 4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함평은 한약방을 하는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 하나는 끝내주게 잘 부르는 소문난 ‘동네 신동’이었다.

“생각해보면 저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운 것 같아요. 네, 다섯 살 무렵부터 열 살 터울의 큰 형님의 마을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노래부터 가르쳐주며 불러보라고 시켜요. 아예 덕석(멍석의 전라도 사투리)를 깔아주면서 무대를 만들어주면 그 위에 올라가 노래하곤 했지요. 특히 그 무렵에는 문창호지에 대고 노랠 부르면 부르르 떨리는 게 아주 재미있어서 그러고 놀았지요,”

어릴 때부터 이미 ‘바이브레이션 기법(?)’을 터득했다고 보아야 할까. 그때 부른 노래 중 ‘나그네 설움’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가 꽤 멀었어요. 10리 길, 4Km를 매일 걸어 다녔는데, 고개를 두 개 넘어야 할 정도로 매우 험한 길이었지요. 매일 한 시간쯤 걸리는 험한 고개를 두 번씩 오가다보니 매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등 엄지발가락을 비롯해 발톱이 깨지고 갈라져 성한 데가 없어요. 지금도 발 형태가 엉망이라 새 양말을 신으면 얼마 못가 금세 펑크 날 정도지요.”

그는 남들보다 두 살이나 빠른 여섯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겨우 여섯 살 된 애기가 일찍 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학교가 멀어서였다.

“입학을 시켜야 하는데 부모님은 늘 농사일 때문에 바쁘시고 또 학교가 멀다보니 데리고 가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여섯 살 되던 무렵 큰 형이 6학년에 다니고 있었지요. 그래서 졸업하기 전에 아예 저를 데리고 가 입학시켰죠.”

때문에 초등학교를 9년간 다녀야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도저히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었고... 그래서 1학년 두 번, 2학년 두 번, 3학년 두 번을 다녀야 했지요. 그런 중에 6.25를 겪기도 했고...”

고생스러웠지만 유년시절을 그나마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오가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할 정도다 보니 숙제도 거의 못 해갔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매나 청소 대신 노래를 시켜요. 그리곤 집에 보내주죠. 굉장히 머니까... 그 먼 거리가 그나마 즐거웠던 것은 노래를 내내 부르고 다닐 수 있어서였겠지요”


중학교 때 동네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가수의 꿈 키워

함평 신광초등학교를 거쳐 함평중학교 시절인 16살 때 처음 동네 콩쿠르에 나가 1등을 차지했다. 상품으로 주는 주전자나 양재기를 타오면서 내심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서울 동국무선공업고등학교(이후 광운공고, 지금의 광운공대)에 진학한 이후에는 아예 공부는 뒷전, 음악학원을 기웃거렸다.

충무로에 있던 중앙음악학원에 등록, 계명이나 악보 보는 법과 기초 이론 교육을 받을 즈음 용기를 내 작곡가 전오승, 김호길 선생 등을 찾아가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악보를 볼 줄 알았고 기타와 피아노를 배우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상을 오선지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음악을 파고들었다. 그러던 중 늑막염에 걸려 다시 귀향한 뒤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한다. 이때가 1962년.

“늑막염을 완전히 치료하고 입대를 했어야 하는데 그걸 몰랐지요. 훈련소 군의관이 귀향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냥 고집을 부려 강원도 5사단에 배치됐어요. 그런데 제가 글씨를 잘 쓰고 노래도 잘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군악대 행정병으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고 또 사단 문선대에서 싱어로 활동하게 되었지요. 군악대와 함께 매년 두 차례씩 함께 공연을 다녔죠.”

그때 그는 주로 가수 도미의 노래들을 불렀다고 회고했다. 그 무렵 유독 몸이 허약했던 그는 이때 위장병을 얻어 62Kg의 몸무게가 50Kg까지 줄어든 상태에서 만기 제대했다.

▲ 예명 ‘홍우성’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발표한 노래 ‘그리워 우는 파랑새’, ‘해피 훼미리’, ‘꿈속의 어머니’가 수록된 음반. 1966년

작곡가 손목인 선생에게 사사,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리워 우는 파랑새’로 데뷔

유년 시절부터 노래를 유독 좋아했지만 그의 데뷔는 남들에 비해 비교적 늦다. 1965년 제대 후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목포KBS에서 개최한 노래자랑에 나갔다가 입상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고배를 마신다. 그 자신은 물론 응원하러 온 후배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심사를 맡은 악단장이 ‘이번에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심사평에 응원을 온 그의 후배들이 항의하는 등 난장판이 벌어지는데 그런 후배들을 다독거린 뒤 그는 본격적으로 가수 수업을 결심, 다시 상경한다.

서울에서 작은 형이 얻어준 방에서 지내며 신세계백화점 옆에 있는 작은 규모의 음악학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작곡가 손목인 선생에게 사사, 가요와 팝을 지도 받는다.

이때 손목인 작곡의 ‘그리워 우는 파랑새’라는 노래를 받아 첫 취입했다. 이 노래는 1966년 아세아레코드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찬 서리 나린 언덕길에 너와 나와 마주 서서/마음속에 간직한 말도 못하고 설레는 마음/바람결 따라 단풍잎이 우수수 지면 그려 우는 파랑새/아-- 너 울면 가을도 간다/ 고운 님 나비되어질 때 아쉬움에 그리움에 슬피 우는 파랑새.’ -‘그리워 우는 파랑새(남상포 작사, 손목인 작곡, 홍우성 노래, 1966년)’.

작사자 남상포는 손목인의 또 다른 예명. 이때 그의 예명은 홍우성(洪羽成)이었다. 홍몽희라는 본명은 아무래도 발음이 어려울 것 같아 작명가에게 부탁해서, 비교적 쉬운 발음인 홍우성이란 예명을 지었다.

아울러 그해 ‘해피훼미리(패밀리, 홍승연 작사, 손목인 작곡)’라는 노래 또한 취입하는데 이 노래는 함께 음악공부를 하던 동기생 이소원과 함께 듀엣으로 불렀다.

‘새아침 둥근 햇님 빙글 오가는 사람마다 벙글/달리는 버스에 줄기찬 전차에 저마다 일터로 간다/그대는 직장으로 안녕 그대는 베이비하고 바이바이/함마와 펜으로 박차는 엔진은 서울의 심장이다...’로 전개되는 이 노래 역시 1966년에 아세아레코드를 통해 발표되었다.

“함께 듀엣으로 부른 가수 이소원은 3살 위인 부산 출신가수였는데 유독 억센 경상도 억양 때문에 고민하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걸 고치려고 항상 신문을 들고 다니며 읽던 모습도....”

신인가수 이소원 역시 그 해 손목인 작곡의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로 데뷔했다.

이 무렵 그는 손목인 선생으로부터 ‘비브라토(vibrato, 바이브레이션)가 너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후에 만난 작곡가 김부해 선생은 그 반대.

“저는 개인적으로 바이브레이션이 없는 깨끗한 창법을 추구했는데 손목인 선생님으로부터 비브라토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제 생각과 너무 달랐지요. 그 다음에 만난 김부해 선생님의 경우는 제자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씩 노래를 녹음한 후 평가하시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내 목소리에 바이브레이션이 너무 많다는 평을 받았어요. 그래서 여기서도 안 되겠다 싶어 새로 찾아간 곳이 마상원(또 다른 예명, 성호민) 작곡사무실이었지요.”

그곳의 단칸방 한구석에서 악보 채보를 도와주고 노래도 연습하며 ‘꿈속의 어머니(신해성 작사, 마상원 작곡)’라는 노래를 취입, 세일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그때 지망생들은 녹음실 견학을 많이 갔었어요. 거기서 ‘꿈속의 어머니(신해성 작사, 마상원 작곡)’를 취입하는데, ‘기성 가수들보다 노래를 잘 한다’는 소문이 녹음실에서부터 나기 시작했어요. 그 소문을 들은 동갑내기 작곡가 주성민씨가 찾아왔어요. 영등포에서 학원을 하고 있었는데 내 노래를 좋아해 친해졌고 이후에 ‘황혼길(반야월 작사, 주성민 작곡)’을 취입하기도 했어요. 이 노래 또한 반응이 없었죠. 음반을 취입한다고 해서 모두 다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이 아니었어요.”
 

▲ 박건이라는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 노래 ‘두 글자’ 음반(1968년). (사진 아래) ‘마로니에 가수’로 불리는 박건의 대표곡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수록 음반(1971년)

가수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기 위해 편곡 공부하다 ‘두 글자’ 악보 접해

결국 그는 스스로 가수보다 작곡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편곡 공부를 하고 있을 즈음 만난 인물이 ‘두 글자’의 작곡가 허현씨다. 그는 이미 4백 여 곡을 작곡한 악보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굉장히 두꺼운 노트였어요, 그 4백 여 곡 중에서 ‘두 글자’ 악보를 발견했지요. 순간 이 노래라면 히트 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허현씨에게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이 노래는 이미 모 음반사에 팔았다는 거야.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 노래를 받을 수 있었지요.” 대중들에게 ‘박건’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리게 된 노래 ‘두 글자’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

사랑 이별 똑같은 두 글자/모든 사람이 만났다 헤어지네/너무나 짧았던 그 행복이기에/나는 너를 못 잊어 그리워서/이별 두 글자 썼다가 찢어 버렸네. -‘두 글자(허현 작사, 작곡, 박건 노래. 1968년)’

“이 무렵 예명을 ‘박건’으로 바꿨어요. 박씨 성은 강렬하게 와 닿는 어감 때문에 그냥 선택한 글자였고 두 글자로만 된 이름이라 대중들이 외우기도 쉬울 것 같았고... 그러고 보니 노래 제목도 ‘두 글자’, 작사, 작곡가 이름도 두 글자야... 느낌이 좋았지요.”

이 노래를 들고 당시 메이저음반사인 오아시스레코드사를 찾아가 작곡자 허현의 기타 반주로 노래를 취입했다. 그러나 박건 자신은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음반사 측에 사정해 녹음실을 바꿔 마장동 유니버샬녹음실에서 재취입했다.

이때 그는 오아시스 문예부장인 민인설 선생의 눈에 들면서 ‘사랑은 계절 따라(가람 작사, 민인설 작곡)’과 ‘청포도 고향(정진성 작사, 작곡)’ 등을 오아시스를 통해 취입한다.
 

메이저음반사 지구에 전속, 작곡가 박시춘, 백영호, 전오승, 김인배와 손잡고 신곡 발표

▲ 대학로에서 열린 사진전 ‘지금도 마로니에는’ 중에서. 2011년

이때 오아시스를 통해 취입한 노래들이 대중들에게 채 알려지기도 전인 1969년 1월, ‘두 글자’가 히트하면서 그는 당시 라이벌 회사였던 지구레코드사 전속가수로 스카우트된다. 작곡가 허현과 함께.
 
“당시 신인이었기 때문에 전속금은 매우 적었지만 국내 최고 메이저음반사인 지구레코드사에 합류하면서 당시 일류 작곡가들인 박시춘, 백영호, 전오승, 김인배 선생으로부터 신곡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정말 뿌듯했고 그런 만큼 열심히 노래를 불렀지요.”

가수 현인의 노래 ‘비 나리는 고모령’을 모티브로 영화가 제작되었을 때 이 영화주제가로 새롭게 만들어진 ‘고모령을 넘을 때(월견초 작사, 박시춘 작곡)’를 취입했고 역시 영화주제가인 ‘떠나가는 왼손잡이(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또한 박건씨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주제가 또한 대중들로부터 주목받지 못했다.

그밖에도 ‘사랑아 언제나(조영호 작사, 김인배 작곡)’, ‘그대 멀리(정두수 작사, 전오승 작곡)’, ‘사랑의 이정표(정두수 작사, 고봉산 작곡)’, ‘웃으면서 안녕(박기수 작사, 김광형 작곡)’ 등을 발표했지만 2년간의 전속기간 동안 이렇다 할 히트곡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구 전속 이전에 오아시스에서 취입했던 ‘사랑은 계절 따라’와 ‘청포도 고향’ 등이 크게 히트하면서 박건은 덩달아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소속은 지구레코드 전속이었지만 정작 노래는 오아시스를 통해 히트되며 각종 인기가요 차트 상위권에 랭크되기 시작했다.
여름에 만난 사람 가을이면 가버리고/가을에 만난 사람 겨울이면 떠나가네/어디서 왔다가 아~ 어느 곳으로 가는지/계절이 다시오면 그대 오려나 그대는 오려나/그대는 떠나가도 계절만은 돌아오고/사랑은 떠나가도 그대만은 못 잊겠어요.
웃으며 만났다 아~ 웃으며 떠난 그 사람/계절이 다시 오면 돌아와 주오 돌아와 주세요/그대는 떠나가도 계절만은 돌아오고/사랑은 떠나가도 그대만은 못 잊겠어요. -‘사랑은 계절 따라(가람 작사, 민인설 작곡, 박건 노래)’
1969년 1월에 발표된 노래 ‘사랑은 계절 따라’이다. 이 노래의 작사가 가람은 작곡가 민인설의 또 다른 예명.

1. 청포도 익어 오는 우물가 샘터는/수줍은 아가씨가 기다리던 곳/못 잊어서 찾아온 고향 그 사람은 떠나고/청포도 송이송이 옛날이 그립구나.

2. 청포도 우물가는 어여쁜 아가씨가/불그레 수줍어서 미소 짓던 곳/그리워서 돌아온 고향 그 아가씬 떠나고/청포도 송이송이 옛 시절 그립구나. -‘청포도 고향(정진성 작사, 작곡, 박건 노래)’

1969년에 취입한 이 노래 ‘청포도 고향’은 처음 모 음반의 뒷면 마지막 곡으로 실렸다가 뒤늦게 히트하자 오아시스 측은 아예 이 노래를 타이틀로 한 새로운 음반을 1970년에 출시하기도 했다.

드라마주제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으로 제2의 전성기 구가

▲ 대학로에서 열린 사진전 ‘지금도 마로니에는’ 중에서.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하는 부분에서의 술 상대역은 필자가 대신했다. 2011년

그렇듯 지구에서는 이렇다 할 히트곡 없이 전속기간이 만료되는 시점에 그는 DBS(동아방송) 라디오연속극 주제가인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취입하게 된다. 이 노래의 작곡가 김희갑 선생의 회고다.

“그때까지 개인적으로는 박건이란 가수를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동아방송국 측에서 이 드라마 주제가만큼은 박건씨가 부르면 아주 제 격일 거라며 적극 추천을 해왔어요. 그래서 그대로 따랐지요.”

당시 동아방송 음악부장은 가수 출신 강수향씨였다. 남성4중창단 블루벨즈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권혜경과 듀엣으로 ‘호반의 벤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가수 출신이기에 노래 분위기와 어울리는  목소리를 파악하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다고 판단되는 부분이다.

쓸쓸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휘파람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슬로우 고고 풍의 노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취입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노래를 취입하러 녹음실에 갔는데 갑자기 김희갑 선생님이 노래 앞부분에 휘파람을 넣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악단원들에게 휘파람 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데 그때 내가 나서서 직접 불어보면 어떻겠냐고 했죠. 그래서 불게 되었는데, 처음 마이크에 대고 부니 소리가 튀며 휘파람소리가 끊어져요. 해서 마이크를 반대로 내려놓고, 다른 곳에서 불었죠. 녹음이 끝난 후 김선생님이 ‘휘파람을 그렇게 잘 부르는지 몰랐다’며 매우 만족해하셨죠. 아마도 이 노래는 휘파람 때문에 더욱 히트된 것 같아요.”

박건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은 가을날의 명곡, 지난 2011년에는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으로부터 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을 널리 알린 공로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그 감사장의 내용.

‘귀하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노래하여 마로니에 공원의 젊음과 낭만을 추억하게 하여 대학로 이미지 고양에 이바지하였으므로 그 공을 기리고저 이 패를 드립니다. 2011년 8월1일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

동시에 ‘지금도 마로니에는’이라는 타이틀의 사진전이 대학로에서 열렸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노랫말을 테마로 열린 이 사진전에서 박건씨를 주인공으로 노랫말을 따라가며 사진작가 동중우와 최광호가 연출했는데 노래 가사 중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하는 부분에서의 술 상대역은 필자가 대신하기도 했다.

가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멋쟁이신사 가수로 각인시켜준 이 노래의 빅 히트를 계기로 박건씨는 10대가수에 선정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2의 전성기가 펼쳐지며 이후 ‘봄이 올 때까지’, ‘남과 북에서’, ‘떠나갔네’, ‘어머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다.

‘봄이 올 때까지’는 1972년, 그가 신세기레코드사에 전속되면서 직접 만든 첫 작곡의 노래다. 이때 사용한 작곡가 이름은 홍박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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